[투석실 이야기]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이른 아침 투석실에 출근할 때 마음으로 기도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치유의 능력으로 아픈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고
두번째는 오늘 하루 응급상황없이 조용하게 지나가길 기도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환자분들을 뵐때면 언제나 지금처럼 안정적인 상태가 계속 유지되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70대 후반의 환자분입니다. 투석을 시작하면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혈관을 수축하여 혈압을 올리는 약인 '미드론'도 복용하는 분입니다. 오랫동안 당뇨도 앓으셨고, 관상동맥이 막혀 스텐트 시술도 여러번 하여 심장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투석을 하면서 혈압이 떨어질 때 심장이 강하게 뛰어 혈압을 올려주는 보상작용을 해주질 못합니다. 투석이 끝나면 비로소 혈압이 조금 오릅니다. 다리에 부종이 심하여 투석으로 수분을 제거하고 싶어도 그러질 못합니다.
어느 날 정강이 쪽에 상처가 생겼습니다. 직경 1.5cm 정도 크기의 작은 상처지만, 다리가 부어있어 잘 낫지 않습니다. 상처사이로 맑은 물 (조직액)이 삐집고 나옵니다. 상처가 부어있고 혈액순환이 안되다보니 몇 개월에 걸쳐 겨우 상처가 나았습니다. 매번 투석할 때마다 소독하고 좋은 드레싱 재료를 사용하고 상처 재생에 효과가 있는 비싼 연고를 사용하여 수개월에 걸쳐 겨우 나았습니다.
다리 정강이 상처가 치유된지 얼마 안되어 발가락에 상처가 났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같은 쪽 다리의 새끼발가락 입니다. 새까맣게 변한 발가락을 보여주었을때 느낌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발가락은 인체의 최말단부위, 혈액순환이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소독을 하고 발가락으로 가는 동맥 혈관을 넓히는 확장술을 했고, 혈관을 확장시키는 약도 썼습니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다가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수술부위가 잘 낫지 않으면 어떡하나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잘 아물어주었습니다. 수개월에 거친 치료와 수술을 끝으로 발가락 2개를 잃었지만,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었습니다. 이제 안정적인 상태로 투석만 잘 받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안정상태는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몇 달 뒤 정기검사에서 생각보다 많이 떨어진 빈혈이 보입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은 백혈구와 혈소판도 같이 조금씩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은 모두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세포들이기 때문에 골수에 문제가 생기면 이 3가지 세포들이 타격을 받습니다. 우선 골수기능을 억제할만한 약이 들어갔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조혈호르몬이 부족해도 빈혈이 생기므로 조혈호르몬을 증량하고 추적검사를 진행합니다. 조혈호르몬 주사 최대 용량에도 빈혈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백혈구, 혈소판도 더욱 감소하였습니다. 결국 적혈구, 혈소판 수혈을 받고 입원하여 골수검사도 진행했습니다.
아마도 골수에서 혈액을 잘 못만들어내는 골수이형성증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안정된 시기가 오나 싶었는데, 언덕을 넘었더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백혈구 생산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면역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우리 몸에서 침입자와 싸우는 전투병인 백혈구 수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스크를 꼭 쓰고 다니시고, 손을 잘 씻고, 가글도 하시고, 음식은 꼭 익혀드시고, 사람많은 곳에 가지마세요..."
이제 몇 일 뒤면 골수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입니다. 골수검사가 나와야 정확히 진단을 할 수 있고 치료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안정적으로 투석을 잘 받으시고 가셨는데, 다음날 전화가 왔습니다. 숨이 차서 응급실에 입원해있다고 합니다. 아직 골수검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며칠뒤 연락을 받았습니다.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임종하셨다고 합니다.
신체 기능이 약하고 상처회복이 더딜 수 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몇 가지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겨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되자 '사람이란 그 운명의 굴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리 잡아 끌어내도 등 뒤에 달린 운명의 밧줄을 사람의 힘으로 끊어낼 수는 없는가 봅니다.